많은 사람들은 아인슈타인을 위대한 천재 물리학자로 기억합니다. 하지만 그는 또한 나치를 피해 탈출한 난민이었고, 난민들을 평생 도운 인도주의자였습니다. 국제구조위원회는 난민이자 인도주의자였던 아인슈타인의 요청으로 탄생했으며, 현재까지도 그의 인도주의 유산을 잊지 않고 난민을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습니다.

저명 물리학자 아인슈타인, 난민이 되다.

알베르트 아인슈타인 초상화 사진
국제구조위원회는 물리학자이자 난민이었던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의 도움으로 1933년에 설립되었습니다.
Photo: 미국의회도서관

1933년, 나치당 총수이자 독일 총리였던 아돌프 히틀러가 12년간의 끔찍한 독재를 시작하며 전 세계를 비인간적인 전쟁으로 끌어들이던 바로 그때, 아인슈타인은 이미 독일의 저명한 물리학자였습니다. 그러나 독일계 유대인으로서 그의 자유는 박탈되었고, 베를린 프로이센 과학 아카데미에서의 교수직도 잃었습니다. 나치는 그의 재산을 몰수하고 불태우며 유대인에 대한 박해를 시작했습니다.

모든 것을 잃은 아인슈타인은 나치 독일의 박해를 피해 수천 명의 다른 유대인과 함께 1933년 10월 17일 미국에 도착, 뉴저지주 프린스턴에 정착했습니다. 당시에는 난민의 안전을 보장하는 프로그램과 구호 기관이 존재하지 않아 아인슈타인은 스스로 방법을 찾아야 했습니다. 이후 이를 토대로 아인슈타인과 그의 아내는 다른 독일 유대인들을 위해 비자를 신청하는 것을 도왔고, 나치를 피해 탈출한 난민들을 개인적으로 보증해주었습니다.  

그는 벨기에 여왕에게 보낸 편지에서 자신의 심정을 이렇게 기술했습니다.

“저는 이곳 프린스턴에 살 수 있는 특권을 누리고 있습니다. 이 작은 대학 도시에서는 투쟁으로 점철된 혼란스러운 목소리는 거의 들을 수 없으니까요. 저는 다른 사람들이 살아남기 위해 고군분투하며 고통받는 동안, 이러한 평화 속에 살아가고 있다는 것이 부끄러울 지경입니다.”

아인슈타인의 도움으로, 국제구조위원회가 탄생하다.

1933년 7월, 아인슈타인의 도움으로 미국 예술가, 지식인, 정치 지도자 등 51명의 유명인이 모여 국제구호협회를 결성했습니다. 이 중에는 철학자 존 듀이(John Dewey), 작가 존 도스 파소스(John Dos Passos), 신학자 라인홀드 니버(Reinhold Niebuhr)이 있었으며, 이후 영부인이었던 엘리너 루즈벨트 등 저명한 이들이 이에 동참하였습니다. 당시 위원회는 국제구조위원회의 현재 뉴욕에 위치한 본부에서 멀지 않은 곳에 사무실을 설립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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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 전 국제구조위원회 전무 이사였던 카렐 스텐베르크가 베를린의 식품 유통 센터를 방문합니다.
Photo: 국제구조위원회

나치의 침공으로 파리가 함락되자, 또 다른 긴급구조위원회가 탄생했고, 이후 유럽의 위기가 2차 세계 대전으로 확대되면서 두 위원회가 힘을 합치게 됩니다. 이것이 오늘날 국제구조위원회가 성장하게 된 바탕 배경이 되었습니다.

국제구조위원회의 자원봉사자들은 1945년 독일의 항복 및 제2차 세계 대전의 공식적인 종전 이후 유럽의 난민들에게 구호를 제공한 최초의 민간인 중 하나였습니다. 그들은 나중에 무솔리니의 이탈리아와 프랑코의 스페인에서도 난민을 도왔습니다.

아인슈타인의 유산, 국제구조위원회가 이어갑니다.

국제구조위원회는 지난 90년 동안 분쟁으로 고통받는 난민 그리고 삶을 재건하려는 이들이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 난민을 돕겠다는 사명을 지키기 위해 노력해 왔습니다. 현재 우리는 전 세계 40개국과 미국의 28개 이상의 도시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건강, 교육, 안전, 경제적 웰빙 및 사람들의 권리증진을 달성하기 위한 최선의 노력을 다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난민의 삶은 여전히 어렵습니다. 유엔난민기구에 따르면 현재 전 세계 6천 8백만 명 이상의 난민이 살고 있습니다. 아인슈타인과는 달리, 많은 사람이 탈출할 수 없거나, 탈출하더라도 안전한 재정착 기회를 보장받지 못하는 난민으로 힘겨운 삶과의 투쟁을 지속하고 있습니다. 한 유명한 물리학자가 새로운 삶의 기회를 얻을 수 있었던 것처럼 그들에게는 우리의 지원이 필요합니다.

여기 또 다른 ‘아인슈타인 같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난민이었던 아인슈타인 그리고 또한 난민의 멘토였던 아인슈타인. 수많은 아인슈타인 같은 사람들이 국제구조위원회를 통해 새로운 곳에 정착하고 삶을 재건하였고, 또한 또 다른 아인슈타인들이 이들의 멘토가 되고 후원자가 되었습니다.

크리스텔 그리고 자나와 찰리 

Christelle, wearing a black leather jacket, smiles and poses in front of a yellow background.
원래는 폭력적인 갈등과 경제적 불안에 시달리며 수십 년을 보낸 콩고 민주 공화국 출신인 크리스텔과 그녀의 가족은 2018년 10월에 국제구조위원회에 도움을 받아 재정착되었습니다. 크리스텔은 배우와 모델이 되기를 꿈꿉니다.
Photo: 앤드류 오버슈타드 / IRC

크리스텔은 엄마 그리고 형제들과 함께 콩고민주공화국에서 벌어진 전쟁을 피해 남아프리카로 도망쳤습니다. 하지만 그곳에서 기다리고 있던 것은 외국인 혐오와 인종차별이었습니다. 2018년 크리스텔의 가족은 국제구조위원회의 지원으로, 아이다호에 있는 보아즈에 재정착할 기회를 얻었습니다.

현재 크리스텔은 배우와 모델 지망생이고 대학생이며 국제구조위원회의 재정착 어시스턴트로, 새로운 삶을 시작하는 또 다른 난민들을 돕고 있습니다. 무엇보다 그녀에게는 절친 두 명이 생겼고 이들만큼 그녀의 재정착 삶에 힘이 되는 것은 없습니다.

In the living room of Christelle’s apartment, Christelle teaches Charlee dance moves as the two laugh. There are children’s toys and two white couches also in the room.
크리스텔레은 보아제에 있는 그녀의 집에서 찰리 댄스 동작을 가르칩니다.
Photo: 앤드류 오버슈타드 / 국제구조위원회

“자나는 나에게 운전을 가르쳐주었고 찰리는 우정 팔찌도 나누어 주었어요.”

그녀는 처음 아이다호로 왔을 때, 이곳에서 자신을 환대해준 자나와 찰리의 친절을 마음 깊이 간직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자나와 찰리는 이렇게 말합니다.

“친절과 환대요? 그건 쉬운 일이죠. 하지만 크리스텔은 우리에게 ‘자신감'이라는 것이 무엇인지, 인생에서 원하는 것을 어떻게 성취해야 하는지 보여주는 롤모델 같은 친구예요.” 

그들은 서로 다른 문화와 가치관을 존중하고 존경하며 우정을 쌓아갑니다. 

Jacqueline Uwumeremyi stands behind a couch where all of her children sit. There are 6 children, 4 boys and 2 girls.
크리스텔의 형제자매는 어머니 재클린 우메리메이와 함께 포즈를 취합니다.
Photo: 앤드류 오버슈타드 / IRC

아인슈타인이 힘겹게 얻었던 기회가 더 많은 난민의 기회로 더 쉽게 확대될 수 있도록 국제구조위원회와 함께해 주세요. 국제구조위원회는 아인슈타인의 인도주의 유산을 바탕으로 난민을 위한 보다 혁신적인 솔루션을 찾기 위해 최선을 다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아인슈타인’이 더 많은 ‘아인슈타인 같은 사람들’을 지원할 수 있도록

여러분의 후원이 필요합니다.